전립선암, 그 절망의 수렁에서 내 생명을 구해준 녹즙
전립선암, 그 절망의 수렁에서 내 생명을 구해준 녹즙
비단실 처럼 부드럽게 흘러 내리는 햇살아래 초록빛 속잎을 틔우며 봄이 익어가고,
병아리색 노란 개나리가 함박 웃음을 지우며 화사하게 피어 오르던 1990년 춘삼월의 새봄.
연로하신 부모님에게는 걱정꾸러기 애물단지요,
결론 적령기의 동생에게는 고급 그랜저 앞을 가로 막고있는 고물차 취급을 받고있던 내가
드디어 예쁜 신부를 아내로 맞아 서른다섯 노총각 꼬리표를 떼어버리고 장가를 들었다.
5년여의 긴 마라톤 연애코스를 달려서 결혼 이라는 결승점에 골인하여
부부라는 인연의 끈으로 매듭지어진 우리는 3박4일의 황홀한 제주도 밀월여행을 다녀온 뒤
둘만의 공간을 마련하여 까치집 처럼 아늑한 보금자리를 틀고 솜사탕 보다 부드럽고,
아이스크림 보다 달콤한 신혼살림을 차려 깨소금 볶아지는 냄새가 솔솔 풍겨나도록 고소하게 살았다.
연여하던 시절, 빠르게 흐르던 시간 때문에 항상 아쉬워하며 헤어지곤 했는데
이제는 그런 안타까운 이별 없이 사랑하는 두사람이 서로의 가까이에서 호흡하며 산다는 현실이
이렇게 가슴시리도록 벅찬 기쁜일 일줄은 결혼전엔 미처 몰랐었다.
아침이면 아내가 사랑을 가득담아 정성스레 차린 식사를 하고,
아내가 다림질한 와이셔츠를 입고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상큼한 기분으로 회사에 출근하여
의욕적으로 일을하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는 저녁무렵이면
아내가 좋아하는 빨간 장미 한다발을 사들고 귀가길의 빠른 발걸음을 재촉하는
기쁨이란 무엇과도 견줄수 없는 행복한 시간들 이었다.
주말이면 다정스레 손을잡고 외식을하고 바람을 쐬러
가까운 교외로 신나게 드라이브를 하면서 신혼의 기쁨을 마음껏 누렸다.
우린 늦게 결혼한 것을 후회하며 서로가 서로를 끔직이 아끼고 사랑하며
원앙처럼 금슬좋게 오손도손 살았다.
아내와 함께하는 신혼의 날들은 정말이지 세상 부러울게 하나없는 사랑이 충만한 날들이었다.
매일매일의 날들이 아카시아 향기처럼 은은한 날들이었고,
꽃가루처럼 날리는 행복의 시간들이었다.
“아, 그러나 어찌 예감이나 했으랴.”
행복뒤에 매복 되어잇는 커다란 슬픔의 복병을….
호사다마 라고나 할까?
신혼의 단꿈이 채 무르익기도 전에 내게 병마의 검은 먹구름이 덮쳐왔다.
결혼 6개월째로 접어든 90년 8월 불볕 더위가 맹위를 떨치던 한여름의 어느날부터 였다.
항문근처의 엉치뼈가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뻐근하게 아프기 시작하더니
며칠이 지나자 소변이 자주 마려웠다.
그리고 소변을 볼때마다 약간의 통증이 수반되고 방광이 항상 가득 차 있는 느낌이었다.
결혼을 해서 그럴 거라는 생각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부끄럽고,
병원엘 가기도 쑥스러워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 생각과는 달리 빈뇨가 너무 심해 잠을 제대로 갈 수가 없었고,
통증은 갈수록 심해졌고, 소변줄기도 가늘어지고 조금씩 나오는게 영 시원치가 않았다.
회사 업무가 너무 과중하여 그럴까?
몸이 너무 피곤해서 그럴까?
여러가지 원인을 나름대로 생각하는데 내몸의 증세는 계속 더해갔다.
온갖 불길한 상상속에 겁이 덜컥 난 나는 회사 근처의 가까운 비뇨기과 의원을 찾았다.
진찰과 소변검사를 한 의사는 전립선염 같으니 며칠동안 치료를 잘 받으면
나을테니까 걱정말고, 집에가면 아주 뜨거운 물에 하초를 푹 담구고 좌욕을 몇번씩 하라고했다.
약간은 안심을 하면서 그날부터 치료와 좌욕을 열심히 했다.
그러자 처음에는 통증도 많이 가시고, 소변도 시원스레 볼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조금 괜찮은 것 같아 치료를 받지않으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과는 달리 두달이 넘도록 치료를 받아도 전혀 차도가 없었다.
오히려 골반뼈와 대퇴골뼈 등이 신경통 환자처럼 쑤시고 아파왔다.
또한 음낭은 얼마나 시림것처럼 아픈지 그 고통이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었고
걸음을 걷기도 불편해졌다.
갈수록 병세가 악화 되는 것 같자 아내는 차라리 한방치료를 받아보자고 권했다.
그래서 여기저기 수소문 한끝에 친지의 소개로 아주 용하다는 한의원엘 찾아갔다.
그곳에서 나를 진맥한 의사는 기가 허하고, 신장기능이 약해서 그렇다며
치료약과 보약을 겸해 한약 몇재먹고 침과 뜸으로 치료하면 깨끗이 났는다고 했다.
그날부터 나는 또 매일같이 한방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그렇게 몇 개월을 침을맞고 뜸을뜨고 쓰디쓴 한약을 지속적으로 복용했지만
한방 역시 나는 전혀 효험을 보지못했다.
그래서 다시 종합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기로 하고, 제법 큰 병원엘 갔다.
그 곳에서 초음파검사와 조직검사, 내시경 검사르 받았는데
의사는 전립선 암이 의심 된다며 대학병원에 가서 다시한번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다.
암, 내 몸속에 암이…}
아직 확실치는 않다고 했지만, 암일지 모른다는 말을 의사에게 들었을 때
너무나 무섭고 절망 스러웠다.
하늘과 땅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어지럼증을 느꼈고,
현기증이 나서 별이 와르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답답했고, 가슴속은 끓는 화산처럼 열기로 가득 달아 올랐다.
머리속에는 방정맞은 생각이 끊임없이 떠오르고, 암이라는 확신과 아닐거라는 부정의 마음이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여 머리속이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제발 암만은 아니길 간절하게 빌며 아내와 함께 나는 서울대 병원에 가서 입원을 하고
소변검사, 피검사, 내시경검사, X-RAY, CT, MRI, 심전도, 유발전위 검사등
무수하게 많은 종합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러나 부정하고 싶은 불행은 언제나 예감이 적중 하는 것처럼,
검사 결과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내 방광의 2/3가 암세포로 가득차있어 매스를 댈수없어 수술조차 불가능한
전립선암 3기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결과였다. 나는 내귀를 의심했다.
어떻게 이런 엄청난 일이 하필이면 나에게 닥쳐왔을까?
수술도 할수없다면 나는 이제 죽어야 할날만 기다려야 한단말인가?
병원에서는 최후의 방법으로 항암제를 맞으며
방사선 치료를 받는길 밖에는 다른 치료방법이 없다고 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인생이라는 열차에 몸을실고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하여 정신없이 달려온 30대 중반의 나.
이제야 됐나하고 한숨을 내쉬는 순간 내몸에는 암이라는 무서운 불청객이 찾아들고…
자신만만하고 패기 등등하던 기세는 소금에 겉절이 한 푸성귀처럼 힘담을 잃고,
나는 절망감에 빠져 말도 웃음도 모두 잃어버린채 눈물만 흘렀다.
눈만 감으면 나를 데리러 온 저승사자의 무서운 모습이 보였고,
관속에 누워 꽃상여를 타고 떠나는 내모습이 보여 나는 극도의 주검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며 전혀 잠을 잘 수 없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어쩌다 잠이들어도 무서운 흉몽을 꾸다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기 일 수였다.
마음을 강하게 다져먹고, 부모님과 아내를 힘들게 하지말고,
모든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자는 결심을 몇번씩 하면서도 뜻대로 쉽게 되지가 않았다.
나는 항암제를 맞으며 방사선과 가시광선 치료를 함께하며 힘겨운 투병생활을 했다.
항암제의 고통을 어떻게 표현할까?
가슴이 째질듯한 답답함과 구역질, 전신을 몸부림치게하는 죽음보다
더한고통 한웅큼씩 뭉텅뭉텅 빠지는 머리카락…
차라리 이고통을 당하느니 죽는게 편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를 향한 아내의 헌신적이고 눈물겨운 사랑을 보면 살아야 겠다는 의욕이 강하게 일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던가?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면서 나는 생애대한 강한 애착과 함께
이대로 쓰러질 수없다는 오기가 생겼다.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는 그저 생명을 조금 연장시킬 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91년 6월 나는 통원치료를 하기로 하고, 가족 친지들의 간곡한 만류도 뿌리치고 퇴원을 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주변정리를 하나하나 해가며
나의 흔적들을 지우기위해 내 앨범들과 일기장 들을 모두 태워 없앴다.
그리고 암을 이기기위해 전립선암에 대한 책들을 구입하여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 한편으로는 그동안 소홀했던 교회를 찾아가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했다.
하나님이 절망을 주실때는 그것을 극복 할 수 있는 힘도 주신다는 능력을 믿으며
기도원엘 가서 금식기도를 열심히했다.
그곳에서 어떤 권사님으로부터 녹즙의 효능과 자연식의 신비에 관한 말씀을 들었다.
물에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속담처럼,
상황이 절박한 나도 권사님의 그 말씀을 복음처럼 듣고
녹즙과 현미 등 자연식을 통하여 암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아내와 함께 녹즙의 강좌도 열심히 듣고 동호회 모임도 참석하여
녹즙과 자연식에 관한 지식을 두루 섭렵했다.
아내는 녹즙 식단표를 구해와 벽에다 커다랗게 부쳐놓고 지성으로 실천하며
내 건강을 회복 시키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다했다.
캠프리, 신선초, 민들레, 씀바귀, 돌나물 등 신선한 채소들을 구입해서
잘 다듬고 흐르는 물에 수십 번씩 깨끗하게 씻어 정성스럽게 갈아서,
전자 저울처럼 정확한 양을 라디오 시보처럼 정확한 시간에 마시도록 해주었다.
처음에는 비위에 맞지않는 녹즙을 마시는 일이 여간 큰 고역이 아니었지만
아내의 정성과 내 병든 몸을 소생시키는 신비의 치료약 이라 생각하며
즐겁게 마시며 완쾌를 기원할 수 있었다.
그렇게 현미와 자연식 녹즙을 장복하며 기도하는 생활을 한 결과
5개월이 지나자 방광에 2/3가 차있던 전립선 암이 깨끗이 없어졌다.
지성이면 감천 이라더니 아내의 극진한 정성과 녹즙의 탁월한 효능 때문에
모두가 불가능이라 생각했던 암을 이긴 것이다.
나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사실에 흥분하며 그 후로도 몇 차례나 더 검사를 받아보았다.
그 결과도 역시 방광이 깨끗하다는 판정이었다.
나는 이제 암세포들을 일망타진 하고 새로운 새 생명을 얻어 다시 태어났다.
얼마나 기쁜지 벅찬 내 기분을 제대로 표현 할 수가 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내 생명의 일등 공신은 녹즙과 자연식 때문이라 믿으며,
나는 자연식의 예찬론자가 되었고, 녹즙의 신봉론자가 되었다.
만약에 내가 녹즙과 자연식을 몰랐다면 나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그 결과는 생각조차 하기 싫다.
나는 이제부터 내게 주어진 새 삶을 철저하게 살리라 다짐했다.
내 혼자만의 일인분 행복을 위해 아둥바둥 하는 삶이 아니라 소외되고
불우한 병든 이웃들과 함께 기쁨은 곱절로 함께 나누고,
슬픔은 절반으로 줄여서 나누는 사랑 가득한 싱싱한 새 삶을 함께 나누리라.
사랑은 나눌수록 커지는 묘약 이니까…
[출처] 천연치유교육센터 체험후기
[원문] http://healthcounsel.co.kr/html/menu3/menu34.html